“1946년에 그는 뉴 타이포그래피의 “조급한 태도는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독일적 성향에 부응하는 것이며 독일의 군사적 지배 의지와 절대 권력에의 욕구는, 히틀러의 권력 장악과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가져온 독일적 특성의 무서운 요소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썼다. 치홀트는, 그래픽 디자이너는 시대를 막론하고 과거의 뛰어난 타이포그래퍼들의 지식과 공적에서 도출된 인본주의적 전통 속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필립 B. 멕스,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황인화 옮김, 미진사, p. 330)

독일 출신 디자이너 얀 치홀트는 ‘뉴 타이포그래피’(모던 아트 운동과 바우하우스에서 비롯된 새로운 디자인 접근법)를 소개했고 추구했다. 그러나 1933년, ‘비독일적’인 타이포그래피를 만들었다는 혐의로 나치에 의해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6주간 보호 구금 상태에 있다가 석방된다(위의 책, p. 329). 이후 치홀트는 뉴 타이포그래피에서 방향을 바꿔 위 인용문처럼 고전적/전통적 타이포그래피를 추구한다. 그는 뉴 타이포그래피에서 “독일적 특성의 무서운 요소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조급한 태도’로 ‘절대적인 것’만을 추구하려는 욕망이었다. 이 욕망은 그 목적을 위해 타자의 자유를 앗아갈 수도 있었다.
여기서 잠깐 독일에서 러시아로 건너가 본다. 치홀트가 구금된 때로부터 80년 전쯤인 1849년, 러시아 출신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반체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이를 면한다. 대신 4년간 시베리아 유형을 떠났다가 돌아오고,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에는 큰 변화가 생긴다. 그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작품의 방향을 튼다. 치홀트의 이야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사례와 비슷해 보인다. 비록 4년과 6주의 차이 외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큰 고난에 큰 전환이 뒤따랐다는 점이 이 둘을 연결한다. 유형 이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더 깊이 있게 됐듯(『죄와 벌』,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 치홀트의 경우에도 전환의 이유와 이후를 좀 더 조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치홀트가 뉴 타이포그래피에서 뒤늦게 전통적인 것으로 전환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건진 잘 모르면서 나이 들면서 보수적이게 되었나 하고 얄팍하게 바라봤었다. 치홀트는 억압의 경험 앞에서 뉴 타이포그래피의 또 다른 측면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치는 뉴 타이포그래피를 두고 ‘비독일적’이라고 했지만, 치홀트에게 그것은 되려 지극히 ‘독일적’인(개중 무서운) 것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 몸 담고 있는 것에, 그것도 스스로의 입으로 선언해온 것에서 고개를 돌리기란 어려울 진데, 치홀트는 과감하게 방향을 틀었다. 나치가 발견하고 통제하려 했던 건 단순히 치홀트의 표면적 작업이 아닌 그 내면의 과감한 통찰이었는지도... 뒤로